홍대 앞 인디 신에서 시작해 십수 년째 노래를 짓고 부르는 싱어송라이터로 살아가는 시와의 이야기.
2006년 무대에 처음 올라 2022년에도 노래를 짓고 부르며 살아가고 있는 시와는 자기만의 색채와 심지가 굳건한 뮤지션이지만 노래하는 사람이면서 자신의 음반을 스스로 제작, 유통, 홍보까지 해야 하는 독립음악가로서의 삶에 고민이 많다. 나직한 목소리로 노랫말이 아름다운 음악을 한다는 세간의 평가는 때로 음악적 한계로 느껴지고, 다른 음악가의 활발한 활동을 보면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말하기보다 좋아하는 노래하기의 힘을 믿으며 성실하게 곡을 짓고, 앨범을 만들어 발매하고, 그렇게 만든 노래로 다음을 향할 에너지를 얻는다. 진지한 태도로 오랫동안 좋아하는 일을 해온 사람이 자신의 일과 삶을 돌아본 기록이라는 점에서, 이 글은 여전히 좋아하는 일에 대한 열망을 간직한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줄 것이다. 더불어 노래를 짓고 부르고 들려주는 일에 관하여, 또한 대한민국에서 독립음악가로 살아가는 법에 대하여 궁금한 사람들도 읽으면 좋다.
지은이
시와
들여다보고 안아 주는 노래를 만들고 부른다. 노래하는 시와로 살기 시작한 것은 2006년. 특수교사로 일하며 음악치료를 수업에 적용해 보려 공부하다가 음악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동안 다시 다음 노래로 향하는 힘을 얻는다. 이것이 마음 깊은 곳에 가닿는 음악의 힘인가 생각하면서. 이제 글쓰기의 힘도 느끼게 됐다. 앞으로 더 써 보겠습니다. 노래도 글도.
추천사
요조 (음악가, 작가)
시와의 노래를 들을 때면 그의 음악은 내내 무반주여도 듣는 사람이 전혀 눈치채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정말 맛있는 반찬 하나만 있어도 한 끼가 모자람 없이 완벽할 수 있듯이, 시와는 목소리와 노랫말만으로도 듣는 사람을 충분히 배부르게 만드는 음악가니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동안 내가 꿈꿔 오던 무음의 악기이다. 시와만이 연주할 수 있는 악기. 소리 없이 그의 멜로디가 되고, 조용히 와르르 쏟아지며 그의 리듬이 되어 주는 악기. 앞으로도 시와가 이 악기를 자주 연주해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잠들고 싶은 사람들과 깨어 있고 싶은 사람들의 곁에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음악이 되어 주었으면 한다.
나는 언제나 시와 같은 음악가의 덕을 보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그저 노래의 통로일 뿐이라고 겸손히 선언하는 이 책의 끝 장을 덮으며 세상과 세상을 매개하는 시와의 노래에 다시, 또다시 감사한다. 바람에 감사하듯이, 씨앗과 꿈에 감사하듯이.
나에게 공연이란 무엇인가. 공연을 하면 돈을 번다, 내 노래를 좋아하는(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공연을 하면 노래를 부를 수 있다, 무대에서, 사람들이 바라보는 곳에서 노래하며 괜찮은 사람이라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공연을 좋아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좋아하는 것인가. 무대에서의 기분을 상상해 보면 알 수 있으려나. 무대 위의 나에게는 떨림과 긴장이 있고, 망치면 안 된다는 마음이 있다. 함께 연주하는 이들이 있다면, 특히 밴드 구성이라면 내가 실수해서 망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자꾸 엄습한다. 다시, 혼자 만드는 무대를 생각해 보자. 내 노래에는 여백이 많다. 가사가 적은 편이고 한 음의 길이가 길다. 쉼표도 길다. 음과 음 사이의 간격은 긴장을 주기도 하고 쉼을 주기도 한다. 그래. 나는 그 긴장을 즐긴다. 숨을 깊이, 끝까지 들이마시고 잠깐 멈추는 순간 같은 긴장. 그리고 다시 목소리를 내면 천천히 숨을 내쉬며 그 속도에 따라 이완되는 몸. 그런 순간 내가 그 공간을, 시간을 장악한다고 느낀다. 그 ‘장악’이라는 행위를 좋아하는 것 같다.
-p.26~27 <공연할 수 없지만 공연하고 싶군요>
그래서 다작을 다짐했다. 지난 음악활동을 돌이켜보면 내가 먼저 움직이고 일을 벌여야 다른 일이 생겨났던 것 같다. 내가 조용하면 나를 찾는 사람도 공연을 섭외하는 사람도 사라졌다. 널리 알려진 히트곡이나 유명세를 얻겠다는 기대 때문이 아니라, 다만 지금 정도의 음악적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새 노래를 발표하는 활동이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행동이다. 신곡 발표와 공연을 꾸준히 해야 매일 수없이 나오는 싱글과 앨범들, 이미 존재하는 멋진 음악가들, 새로 나타나는 멋진 음악가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아니 더불어 살아남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p.46 <다작을 해야 해>
음악가로 산다는 것은, 그중에서도 스스로 음반을 제작하는 독립음악가로 산다는 것은 음악적인 일 외에도 그 제작과 유통, 홍보에 관계된 모든 일을 함께해야 함을 뜻한다. ‘고생스럽고 버거워도 나 아니면 누가 해 주나’ ‘내가 나를 끌고 가야 해’ 하며 한 해 한 해 지나왔지만 최근에는 모든 걸 다 잘, 완벽하게 해 내려는 마음을 조금 내려놓았다. 이 일을 더 오래 하려면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싶은 만큼만 하는 마음의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것 같다. 그러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p.57 <이렇게 하루가 갑니다>
느긋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다가도 무대에 오르기 직전이면 심장이 마구 뛴다. 심장 콩닥 증상에 시달리길 어언 16년. 멀쩡하다가 꼭 공연 시작 직전에 이런다며 원망하던 때가 있었고, 심장의 쿵쾅댐을 가라앉히려고 ‘네가 최고야’를 수없이 되뇌던 때가 있었다. 그 시기를 거쳐 이제는 ‘음, 심장이 뛰는구나’ 인식한 뒤 오른 손가락을 가볍게 왼 손목에 올리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맥박을 잰다.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셈하는 박자에 맞춰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쉰다. 그러면 자연스레 맥박이 늦춰지-지는 않고, 그대로다. 그냥 그렇게 노래하러 올라간다. 하하.
-p.87 <이렇게 하루가 갑니다>
이른 퇴근길이 시작된 무렵이었던가. 아파트 진입로와 넓은 도로에 차가 아주 많았다. 사람도 많았다. 지하철에서부터 끼고 있던 이어폰을 빼지 않고 노래를 이어 들었다. 몇 곡을 거쳐 그즈음 발매한 내 노래 ‘숨’이 흘러나올 때 깨달았다. ‘나는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만들고 있었구나.’ 너무 당연한 사실을 늦게 알아차린 걸까. 꽉 찬 소리들 사이에, 사이를 만드는 노래. 숨 쉴 틈을 주는 노래. 귀를 쉬게 하는 노래. 자신이 듣고 싶은 음악을 만드는 음악가라서, 그 사실을 알아차려서 기뻤다.
-p.110~111 <음악이 듣고 싶을 때>
남겨 둔 말, 되삼킨 말들은 노래가 된다. 모든 노래가 그렇게 남겨 둔 말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남겨 둔 말은 언젠가 노래가 된다. 그렇기에 때로는 나만이 알아듣는 이야기를 넣은 노랫말이 탄생한다. 물론 그 노래는 듣는 이에게로 가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담을 것이다. 글을 쓰며 깨달았다. 내가 삶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안전하다는 기분, ‘안전감’이다. 그리하여 이렇게 노래를 만들고 부르며 살고 있다는 것도. 이어서 누군가 해 준 말이 떠오른다. “네 노래는 말없이 곁에 있어 주는 친구 같다”라고.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는 대신 노래로 만들어서 그런가.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있다면 많을까. 나와 닮은 생각으로 안전감을 원하고 그만큼 조심스럽게 지내는 이들이 있다면, 내 노래가 안전한 친구가 되어 줬으면 좋겠다.
-p.119 <남겨 둔 말, 되삼킨 말, 노래가 되는 말>
나는 무릎을 쳤다. ‘그래 이거지. 노래란 이런 거지. 내가 어떤 상황에서 이 노래를 썼든 노래는 듣는 사람에게로 가서 그의 노래가 되는 거지. 내가 만든 의미 그대로 잡아 두려고 할 필요도 없고, 잡으려고 한 의미보다 더 넓어지는 것, 그게 노래지.’ 제목을 정하지 못한 새 노래를 들으면서 어떤 이는 강아지를 떠올리고, 어떤 이는 귀갓길을 생각했으며, 어떤 이는 먼저 발표한 나의 노래 ‘다녀왔습니다’의 대답 같은 노래라고도 했고, 어떤 이는 산고를 겪으며 몹시 고통스러웠을 때 말없이 등을 쓸어 주던 손길을 떠올렸다.
-p.139 <제목을 정했다>
돌아보니 내 노래가 모두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온전히 나로부터 비롯된 노래가 있다는 것은 환상이었다. 나는 ‘전달하는 사람’이겠다. 세상의 좋고 싫은 것들을, 그 둘로 쉽게 나눌 수 없는 것들을 경험하며 나를 통과한 생각과 감정이 노래로 나온다. 노래는 내가 기대하지 않는 순간에 나에게 온다. 노래가 나를 부른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다시, 노래는 그 말 자체로 ‘부르는’ 것이다. calling. 그리하여 노래는 ‘불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노래는 불러내고 싶은 것들의 통로이고, 나는 그 노래의 통로이다.
-p.145~146 <노래가 나를 부르고 나는 노래를 부르고>